그림이야기

동양화에서 그림자를 그리지 않는 이유는?

메리지안 2025. 5. 3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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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단오풍정>

 

 

서양화를 보며 감탄하다가 동양화를 보면, 의외로 허전하다고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특히 인물이나 사물이 분명히 묘사되어 있는데도, 그림자가 전혀 없는 것을 보고

"이건 덜 그린 건가?"

"왜 저기엔 명암이 없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표현 방식의 차이가 아닙니다.

동양화에서 '그림자를 그리지 않는 것'은 철저히 의도된 표현이며,

그 안에는 깊은 철학이 담겨있습니다.

 

오늘은 동양화에 그림자가 없는 이유를

미술사적, 철학적 관점에서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1. 동양화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느껴지는 것'을 그리는 예술

 

서양 미술은 고대 그리스 부터 인체 비례와 사실성을 중시해 왔습니다.

르네상스 이후에는 과학적 원근법, 명암법, 투시법까지 발달하면서 

시각적으로 실제와 거의 유사한 재현이 미술의 목표가 되었죠.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반면, 동양화는 애초부터 사실묘사 보다는 정신표현에 초점을 두고 발전했습니다.

예를들어 , 중국 송대 이후 동양회화에서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즉 '사물의 생동하는 기운을 살리는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습니다. 이 기운은 단순히 모양이나 빛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정신, 붓의 흐름, 여백의 사용을 통해 전달 됩니다.

 

즉, 동양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과 '정신'을 그리는 예술입니다.

 

이런 철학 아래에서는 그림자를 굳이 넣지 않아도 그림의 의미가 더 또렷하고 상징적으로 전달됩니다.

 

 

2. 동양화는 '이상세계의 본질'을 담는다

그림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전제로 합니다.

빛이 한 방향에서 비춰야 그림자가 생기고, 시점이 고정되어 있어야 명암이 발생하죠.

 

하지만 동양화는 그런 현실적인 제약을 뛰어넘는 예술입니다.

산수화를 보면, 낮인지 밤인지, 해가 어디있는지 애매한 경우가 많죠.

왜냐하면 중요한건 자연의 '사실적인 장면'이 아니라, 그 자연속에 담긴 철학과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정선 <인왕제색도>

예를들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보면

산의 형태아 구름, 바위 등은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졌지만, 그림자는 없습니다.

그 대신, 먹의 농담과 붓의 질감, 여백의 배치만으로도 그날의 날씨, 정서, 공간의 기운까지도 전달됩니다.

 

동양화에서 그림자를 그리지 않는 이유는, 

현실의 물리적 사실보다 더 중요한 '마음의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3. 여백의 미와 시선의 흐름

 

동양화의 미학을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개념이 바로 '여백의 미' 입니다.

서양화는 캔버스를 꽉 채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동양화는 비움으로써 더 큰 의미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여백은 단순한 '공간의 부족'이 아니라, 그림속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

보는이의 상상력, 시선의 흐름까지 유도하는 중요한 구성요소입니다.

 

그림자를 넣게되면 공간은 더 사실적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이 여백이 주는 정적이고 깊은 울림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4. 고정시점 vs 유동시점 - 동서양 시각체계의 차이

 

서양화는 원근법, 투시법을 통해 하나의 시점에서 본 장면을 묘사합니다.

이는 마치 창문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과 유사하며, 그림자 역시 이 틀안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합니다.

 

그에반해 동양화는 다양한 시점을 결합하여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한 화면에 담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감범(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점), 이동 시점 산수화 입니다.

 

이인문 <강산무진도>

 

예를 들어, 한폭의 동양 산수화를 감상하다 보면 화면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시선이 이동하며 강을 따라 오르고,

산을 넘고, 구름 속 절경을 감상하는 '시간여행'을 하게 되죠.

이러한 구조속에서 그림자는 오히려 화면 전체를 특정 시점에 고정시켜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림자를 그리지 않는 그림'은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던 다른방식의 세상 보기 일지도 모릅니다.

 

동양화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걸 다 설명하지 않아도,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너머의 의미와 기운을 담는 동양화의 세계.

 

다음번에 동양화를 마주하게 된다면,

"왜 그림자가 없지?"가 아니라

"이 그림이 나에게 어떤 기운을 주는가?"를 떠올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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